이경항(李慶恒:1601∼1643)은 자(字)자는 사상인데, 또다른 자(字)자로는 중구(仲久)라는 자도 있다. 본관은 우계(羽溪)로 이상의 가계는 첨정이공묘갈명에서 미수 허목(許穆)이 기술한 바와 같다. 다만 1633년 인조 11년에 종손 이기원(李基元)과 취사공의 종손(從孫)되는 이희(李熺) 우계이씨 숭정보서를 편찬할 때, 선계를 고찰함에 있어 예빈경(李球) 이전의 3대 조상(洪俊, 迪, 純祐)을 이미 고증하였건만, 왜 이경항의 묘갈명에는 시조가 예빈경으로 나와 있는가가 의문스럽고, 그보다 20여년 이전에 족보를 편찬할 때, 이기원의 증조부 증 장악원정 율재공(慄齋公) 이찬(李讚)과 취사공 이여빈(李汝 ) 등이 주축으로, 경(京)에 거주하는 이경항의 백부 이명남(李命男,1556∼1619) 등 일부 경주변에 거주하는 일가들도 족보편찬에 참여하게 되었던 바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영남지역의 일가들과 연락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묘갈을 작성할 때 선계가 누락된 점이 걸린다. 다만, 영남에서 경까지가 거리가 먼 관계로 연락이 안 되었다면 예빈경 이전의 3대가 고증된 것을 모르고 예빈경을 시조로 하였을 수도 있다.
가계 배경
이경항의 13대조 구(球)는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制科)에 합격하고 고려에 벼슬하여 관직이 예빈경 동정(禮賓卿同正)에까지 올랐다. 그 후손 의(山+疑)는 태조(太祖)의 공신(功臣)으로 사적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다. 5대를 내려와 동돈녕(同敦寧) 지방(之芳)이 있는데, 변방의 군대를 이끌고 오랑캐를 공격하여 그 공로로 관직이 높아졌다. 동돈녕은 참판(參判) 광식(光軾)을 낳았고, 참판은 대사헌(大司憲) 감(戡)을 낳았고, 대사헌은 주서(注書) 성헌(成憲)을 낳았고, 주서는 선무랑(宣務郞) 길남(吉男)을 낳았고, 선무랑은 공을 낳았다.<미수기언, 첨정이공묘갈명><국조인물고, 첨정이공묘갈명>
그의 어머니 하동정씨는 정인지의 4대손이라 하는데, 정인지의 아들 중 호조판서 하남부원군 장정공 삼성재 정숭조(三省齋 鄭崇祖)의 증손녀가 된다. 할아버지는 감찰 정승근(鄭承謹)이고, 친정아버지는 도사를 지낸 정욱이다. 조선 말기의 실학자의 한 사람으로 동국대지도(東國大地圖)를 작성한 정항령(鄭恒齡)은 정욱의 형제인 정식의 후손이다.
정숭조의 형 정현조(鄭顯祖)는 세조의 장녀 혹은 차녀인 의숙공주(懿淑公主)의 남편이다. 그런데 의숙공주가 자녀 없이 죽자 충찬위였다가 선무랑 목청전직을 지낸 이징(李徵)의 딸과 재혼하여 9남 1녀를 두었다. 부마는 재혼이 금지되었는데, 이 일로 성종 때에 이징의 딸을 첩으로 봐야 되느냐, 정실부인으로 봐야 되느냐를 두고 여러번 논란이 되었지만<성종실록><중종실록>, 결국 중종 때에 가서 재혼을 인정하고 아들들도 관직에 나갔다. 선무랑 목청전직 이징은 이경항의 부계 6대조가 된다.
이징의 아들은 이지방(李之芳)과 이지영(李之英)이고, 이지방에서 이광식, 이감, 이성헌으로 가계가 이어진다.
5대조 이지방(李之芳. 1466 ~ 1537)은 1489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490년~1491년 북정부원수 이계동의 부관으로 출정하여 여진족을 상대했다. 이때 그는 여진족 수십여 명의 목을 베기도 했다.〈성종실록〉 또한 말에서 낙마하여 여진족에게 체포당할 뻔한 허종을 구출했는데, 정은부, 구현휘 등과 화살을 쏴서 여진족들을 명중시켰다.〈성종실록〉 이후 종성부사를 거쳐 연산군 때 그의 족친 중 내관이 있었다는 이유와, 이 내시가 연산군의 비리를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파면당한다.〈연산군일기〉 이지방의 가까운 친척 중에 내관, 내시(內侍)가 된 인물도 있었다는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우계이씨족보에는 전하지 않는다. 외가나 처가면 외척, 외족, 처가면 처족이라 하거나 妻라는 단어가 붙는 것이 보통이다. 이 내관은 아마도 이지방의 부계 혈족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 이지방은 회령부사, 의주목사, 함경남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고 1516년 명나라에 문정왕후 윤씨의 책봉주청사로 다녀온 뒤 경상좌도수군절도사와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한때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특별 승진했다가 대간의 거듭된 논박으로 도로 취소되었다.〈중종실록〉
이지방은 청송심씨와 결혼했는데, 청송심씨는 봉사 심안신(沈安信)의 딸로서, 어머니는 고성이씨로 주부 이희진(李希振)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로 증영돈녕부사 망세정 심선(沈璿)이고, 증조부는 호조판서 양혜공 심석준(沈石雋)이며, 고조부는 인수부윤(仁壽府尹) 심징(沈澄)이다. 심징은 소헌왕후의 친정아버지 심온의 형이자 개국공신 심덕부(沈德符)의 아들이었다.
청송심씨에게서 딸 우계이씨, 아들 이광식, 딸 우계이씨 등을 두었다. 다른 자녀의 존재여부는 알수 없으므로 장남, 장녀, 차녀 등의 칭호는 쓰지 않는다. 딸은 원주변씨 변안(邊晏)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이광식이고, 딸은 파평윤씨 윤확(尹確)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윤위(尹威)이다. 윤확은 윤번(尹璠)의 5대손으로, 윤사흔(尹士昕)의 4대손, 윤계겸(尹繼謙)의 증손이 된다.
고조부 이광식(李光軾, 1493 ~ 1563)은 1516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 병조좌랑을 거쳐 1523년 세자익위사 사어, 1528년 김해부사, 군기시첨정을 거쳐 군기시부정에 승진했다. 사직하고 다시 김해부사로 발령되었다가 무재가 있다는 이유로 갑산부사로 발령되었다. 이후 만포첨사 심사손이 여진족에게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해서 종성부사로 부임한다.
1530년에 여진족이 경원진을 넘어와 통사(통역관)를 살해한 뒤 수시로 문제를 일으키자 1533년 가선대부 여주목사로 승진했다가 체직되고, 1538년 성주목사를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된다. 이때 동료가 함부로 살해당한 것에 불만을 품은 여진족이 넘어와 변장들을 살해하자, 여진족 소굴로 들어가 여진족을 위무하고 돌아왔다. 그 뒤로도 임기가 차서 체직되어야 했지만 연임되었다. 1546년 병조참판, 공조참판, 이듬해 동지중추부사, 상호군, 비변사당상을 거쳐 1548년 다시 병안병사가 되었다가 체직되어 그해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 1549년 경연특진관, 1550년 판결사, 비변사당상 1551년 병조참판, 행호군, 다시 병조참판을 거쳐 1553년 한성부우윤, 동지중추부사, 병조참판, 1554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555년 5월 달량진 해변을 침략한 왜구를 소탕한 뒤 그해 10월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이광식은 함안이씨와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다. 함안이씨는 정국공신 4등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낸 함안군 양간공(襄簡公) 안재(安齋), 수옹(睡翁) 이세응(李世應, 1473 ~1528)의 딸로, 중종조의 훈신이면서 문신이고 저술 안재역설 (安齋易說)을 남겼다.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사헌부감찰 김미(金楣)의 딸이고, 할아버지는 사재감부정 증 이조참판 함성군 이계통(李季通), 증조부는 사재감부정 증 병조참의 이흥손(李興孫)이다.
장남은 이계변(李繼邊)인데, 문화류씨가정보에 등장한다. 그러나 이계변은 별다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찍 요절하였다. 차남은 이감(李戡)인데 이경항의 증조부가 된다. 삼남은 이전(李晉+戈, 1517 ~ ?)으로 충장공 이복남(李福男)의 할아버지이며, 이복남은 임진왜란 초기에 전주 웅치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1597년 8월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다. 그리고 셋째 아들 이경보(李慶甫)가 일본 고니시 유키나카의 군대에 납치되지만, 장남 이경여(李慶餘, 1579 ~ 1636)이 무과에 급제, 이후 무관(武官) 가계를 이어갔다. 무과방목에는 1591년생으로 등장하지만 이것은 기록오류로서, 이경여가 1591년생이라면 1590년생인 이경보의 형이 될 수 없다. 아버지 이복남은 1555년생이다. 이경여는 1579년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광식의 넷째아들은 이용(李庸+戈, 1533 ~ 1591)으로 1555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 형조좌랑, 형조정랑을 거쳐 1574년 강계부사, 이후 경상우병사, 1580년 길주목사, 1581년 전라좌수사, 1582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겸 경성부사를 거쳐 1582년 관노 혹은 공노비를 첩으로 삼았다가 고산찰방의 탄핵으로 면직됐다. 이후 1582년말 함경남도 도체찰사 겸 순찰사를 거쳐 1583년 이탕개의 난 때는 방어사와 남병사를 지내고 1589년 인천부사를 지냈다.
딸 우계이씨는 파평윤씨 윤강(尹綱)에게 출가했는데, 윤지임의 손자이자 윤원개의 아들이다. 윤원개는 윤원형, 윤원로의 형이자 윤춘년의 사촌동생이고, 문정왕후의 친정오빠이다. 그리고 외손녀는 광주이씨 이중경에게 출가했다. 다른 딸 우계이씨는 신경호(申景濩)에게 출가했는데 신경호의 본관은 전하지 않는다. 또다른 딸 우계이씨는 이춘림(李春林)에게 출가했는데, 현감이라는 것과 자녀없음이 전한다. 본관은 미상이다.
이세응의 묘갈명에는 이광식의 아들 언소(彦昭), 언점(彦漸)이 등장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친손자, 친자녀라 해도 10세 미만 혹은 15세 미만인 미성년자의 이름은 비석에 싣지 않는다. 최소 나이 10살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바, 이감, 이전의 본명이 확실해보인다.
증조부는 이감(李戡, 1516 ~ 1583)으로 이감(李勘)으로도 문헌에 나타난다. 1543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바로 그해의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중종실록〉 그러나 사관(史官)으로 실록 기록을 누설한 일과 동료의 직언을 누설했다 하여 중종실록과 명종실록에는 그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들이 종종 목격된다. 예문관봉교로 자문을 잘 지어 명나라의 칭찬을 듣기도 했지만, 1545년 실록 기록 누설과 동료의 직언을 누설한 일로 여러번 공격을 받다가 홍문관정자에서 면직된다. 그뒤 윤춘년, 윤원형 등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의 측근으로 활동했고, 명종 초에는 삼사와 전랑직을 지냈으며 1552년 함경도순변사 이준경(李浚慶)의 종사관으로 다녀온 뒤 장흥부사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종성부사로 바뀌어 부임하였다. 1558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의 측근으로 갔다.〈명종실록〉 이후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도승지를 거쳐 중종의 능침을 이장한 공로로 가의대부로 승진하고 병조참판, 동지, 1563년 사헌부대사헌에 이르러 심의겸(沈義謙), 기대항(奇大恒)의 공격을 받고 대호군으로 좌천되었다. 그해 10월 수안(遂安)으로 유배됐다가〈명종실록〉 함경북도 경원으로 유배되었으며 1581년 풀려난다.〈명종실록〉〈선조실록〉 함경북도 경원으로 유배된 뒤에도 그는 그 지역에서 문인들을 가르쳤는데, 임진왜란 때 혜산첨사로 순절한 최대양(崔大洋)이 이감의 문하생이다. 경상감사 재직 중 경상도의 흉년 진휼에 힘썼고, 소고 박승임의 건의를 받아들여 회헌 안향의 영정 보수와 서원 건립 복구 등에도 힘썼고, 이황을 찾아 예를 표하기도 했다. 경상감사 재직 중 인심을 얻었기에, 그곳으로 부임한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그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증조 이감은 풍천임씨와 예천윤씨 두 부인을 두었는데, 예천윤씨는 1810년 우계이씨족보에는 예산윤씨(禮山尹氏)로 기록되어 있어 추가로 확인해봐야 될 사항이다. 첫 부인 풍천임씨에게서 이성헌(李成憲)을 두었고, 딸 1명이 족보에 나타나는데 임권의 묘갈명에도 1남 1녀가 전한다. 다른 딸의 여부는 확인이 필요하다. 딸 1명은 윤유후(尹有後)에게 출가했는데, 파평윤씨로 소정공 윤곤의 후손이며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 윤호의 증손이 된다. 윤유후는 성삼문의 시문들을 모아 처음으로 성삼문의 문집을 세상에 전했다고 한다.〈성근보집, 성근보유고(成謹甫遺稿)〉
할아버지는 이성헌(李成憲)인데 156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국조방목〉, 이후 관직에 올라 승정원주서, 영서찰방, 승문원주서 등을 지냈지만 아버지 이감에 연좌되어 여러번 사림파의 공격을 받고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1563년 일단 복직하여 승문원정자, 예문관검열을 지냈다가 1564년 파직당하고, 승문원박사에 임명되었다가 1565년 양사의 계속된 공격으로 파직당한다.〈명종실록〉〈선조실록〉 할아버지 이성헌의 기록은 이것이 전부인데, 이경항의 할아버지 이성헌의 기록은 상당히 빈약한 편이다. 추후에 확인과 고찰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성헌은 부인 2명을 맞이했는데 모두 전주이씨이다. 첫 부인 전주이씨는 광원수 증 광원군 이구수(광廣原守 贈廣原君 李耉壽, 1514 ~ 1567)의 딸로, 친정어머니는 동래정씨로 현감 정구년(鄭龜年)의 딸이다. 조부는 광성정 이전(匡城正 李銓), 증조부는 운산군 이계(雲山君 李誡)이다. 세종대왕의 아들 밀성군 이침(密城君 李琛)의 고손녀가 된다.
이성헌의 두 번째 부인도 전주이씨로, 국조방목에 등장한 이한(李澣)의 딸이다. 이한의 가계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세조의 서자 덕원군 서(德源君)의 아들 연성군(蓮城君)의 딸 중 1명이 전주최씨 최준(崔濬)에게 출가했다 하고 출가녀 최준 女 李成憲이 등장한다. 혹시 최준의 사위 이성헌이 우리 우계이씨 이성헌인지는 차후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이성헌의 첫 부인, 광원군 이구수의 딸 전주이씨에게서는 아들 이명남(李命男, 1556 ~ 1619)과 이길남, 그리고 딸 1명이 전한다. 이 딸 우계이씨는 덕수이씨 목사 이안민(李安民)에게 출가하여 이강(李木+畺), 이담(李木+詹), 군수 이격(李格), 이환(李桓)과 정언유(丁彦瑜)에게 출가한 딸을 둔다. 각각 이명남은 이경항의 백부, 이안민의 처 우계이씨는 이경항의 고모가 된다.
아버지 이길남(李吉男, 1561 ~ 1644)은 본명이 이영남(李英男)인데, 이길남으로 개명한다. 다만 이경항이 1613년 생원시에 합격할 때나, 그 해에 진사시에 합격할 때까지만 해도 이영남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사마방목 이경항 생원편, 사마방목 이경항 진사 편> 1627년에 이경항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할 당시에는 이미 이름을 이길남으로 개명한 상태였다.<국조방목 이경항 편>
어머니 하동정씨(河東鄭氏, 1562 ~ 1642)는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정욱(鄭彧)의 따님으로, 세조(世祖) 때 재상을 지낸 정인지(鄭麟趾)의 4대손이다.<미수기언, 첨정이공묘갈명><국조인물고, 첨정이공묘갈명> 하동정씨 부인의 친정아버지는 도사와 군수를 지낸 정욱(鄭彧, 1527 ~ ?)이고, 조부는 사헌부감찰 정승근(鄭承謹, 1476 ~ 1555), 증조부는 호조판서 봉조하로 숭정대부 하남부원군인 장정공(莊靖公) 삼성재 정숭조(三省齋 鄭崇祖, 1442 ~ 1503)이다.
정숭조의 형 정현조(鄭顯祖)는 세조의 장녀 혹은 차녀인 의숙공주(懿淑公主)의 남편이다. 그런데 의숙공주가 자녀 없이 죽자 충찬위였다가 선무랑 목청전직을 지낸 이징(李徵)의 딸과 재혼하여 9남 1녀를 두었다. 부마는 재혼이 금지되었는데, 이 일로 성종 때에 이징의 딸을 첩으로 봐야 되느냐, 정실부인으로 봐야 되느냐를 두고 여러번 논란이 되었지만<성종실록><중종실록>, 결국 중종 때에 가서 재혼을 인정하고 아들들도 관직에 나갔다. 선무랑 목청전직 이징은 이경항의 부계 6대조가 된다.
그의 형 이경복(李慶復)의 행적과 기록은 전하지 않고 있다. 족보에도 이름만 단순히 올라가 있었는데, 사마방목 이경항이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할 당시에는 생존해 있었다.<사마방목 이경항 (생원)편><사마방목 이경항 (진사)편> 후일 이서우의 송파집에 할아버지 이길남의 묘비문을 기록한 것을 통해 그가 한영의 딸과 결혼했는데 일찍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영은 본관은 청주로 한확의 장남 한치인의 5대손으로 증조부는 한세륜(韓世倫)이고, 할아버지는 한수(韓脩)이고, 아버지는 한희록(韓希祿)이다. 한희록은 한세륜의 아들 한척의 아들인데 큰아버지 한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한영은 광해군 때의 북인계열 언관으로 활동했는데 이 일로 1623년 인조반정 후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6월 19일에 사망했다. 한영은 소혜왕후 인수대비의 친정아버지 한확의 후손으로 이 가문과 그의 집안은 혼반관계가 보이는데, 한치인의 다른 아들 한한의 증손 한강은 이복남의 조부 이전의 사위가 된다. 한치인의 사촌동생이며 한치형의 동생 한치량의 증손자 한곤의 딸이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전사한 이복남의 부인이다.
형 이경복과 청주한씨 한영의 딸 사이에서 자녀가 있었는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송곡 이서우가 쓴 할아버지 이길남 묘비문에는 언급이 없는데, 간혹 딸의 경우 있더라도 생략하는 일이 있고, 사망자의 후손이라 해도 당시 미성년자, 최소 10살 미만일 경우에는 비석에 이름을 싣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경항은 소암(疎巖) 임숙영(任淑英)의 문인으로 글을 배웠다.<국조인물고> 후에 이경항이 북인 당에 입당했다는 의혹을 받자 스승을 배신했다는 인신비방이 가해지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북인이나 대북에 가담했다거나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는 근거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대동야승 등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뒤에 나타나는 사마방목에는 유학으로 되어 있으나, 그는 1616년 한때 직장을 잠시 역임했다가 물러나기도 했다.
1616년 6월 29일 한때 역모로 오해받아서 소동이 일어난 해주의 최기(崔沂)의 옥사 때, 이원(李源)의 흉서, 정확한 내용은 알수 없는 흉서에 그의 이름이 들어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공초를 받았다. 당시 그는 전 직장(直長)이었다. 그러나 별 혐의점이 없으므로 처벌받지는 않았다.<광해군일기[중초본] 104권, 광해 8년 6월 29일 무진 1번째기사 1616년 명 만력(萬曆) 44년 죄인 전 감찰 유회·허통·이경림 등이 진술하다><광해군일기[정초본] 104권, 광해 8년 6월 29일 무진 1번째기사 1616년 명 만력(萬曆) 44년 죄인 전 감찰 유회·허통·이경림 등이 진술하다>
광해군일기 104권, 광해 8년 6월 29일 무진 1번째기사 1616년 명 만력(萬曆) 44년 죄인 전 감찰 유회·허통·이경림 등이 진술하다국역원문중초본/정초본. 원본 보기
죄인 전 감찰 유회(柳淮), 허통(許通), 이경림(李慶林) 【유회는 실제 이름은 유호(柳浩)이고, 경림은 실제는 경림(慶臨)이다. 】 , 전 직장 이경항(李慶恒), 양금(梁嶔)이 공초하였다. 【이름이 흉서에 나왔다고 이원이 공초한 자들이다. 】
1618년(광해군 10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사마방목 기록)하였으나, 이는 묘갈명에 실리지 않은 듯 싶다. 이경항은 그 해 식년시(式年試) 생원에 3등 21위로 입격하여 생원이 되고<사마방목 이경항 생원시 편>, 바로 그 해의 식년시(式年試) 진사시에는 1등 5위로 합격하였다. <사마방목 이경항 진사시 편>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쌍련(雙蓮)이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사마방목 이경항 진사시 편>
19세에 천거로 박사제자로 관직에 올랐으며, 1623년(인조 1) 4월 11일 봉선전 참봉(奉先殿參奉)에 임명되었다.<국역 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 4월 11일(경오) 4번째 기사, 흐리고 하우가 옴, 정찬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국조문과방목 기록에 의하면 정8품 통사랑으로 1627년 인조 4년의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국조방목>
그해 그는 성균관학유로 보임되었고, 이듬해 승자(정3품 이상으로 승진하였으니, 아마도 이때 통훈대부로 승진한 것 같다.)하여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며, 감찰 형조좌랑 공조좌랑 형조정랑 공조정랑 군기시첨정 사복시첨정 종묘서령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신계현령 예안현감 결성현감 경상도(영남) 도사, 함경도(북관) 도사 등을 역임했다.<미수기언 첨정이공묘갈명, 국조인물고 이경항 묘갈명>
1627년 그가 문과에 신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로 발령된게 보고되었다.
이조가 올린, 새로 급제한 자는 권지 성균관 학유(權知成均館學諭) 박금(朴嶔)ㆍ이기발(李起浡)ㆍ도신수(都愼修)ㆍ이경항(李景恒)ㆍ이장(李樟)ㆍ원급(元伋)ㆍ조희인(曺希仁)ㆍ김태기(金泰基)ㆍ유덕창(柳德昌)ㆍ이기영(李奇榮)ㆍ이생발(李生浡)ㆍ이명전(李明傳)ㆍ전명연(全命然)ㆍ원해익(元海益)ㆍ이정규(李廷圭)ㆍ송국준(宋國準)ㆍ정호인(鄭好仁)과 권지교서(權知校書) 김태성(金泰誠)ㆍ박사성(朴思誠)ㆍ이유(李愈)ㆍ여상규(余尙珪)ㆍ곽융(郭瀜)ㆍ이경승(李慶承)ㆍ염우선(廉友善)ㆍ윤여징(尹汝徵)ㆍ차달원(車達遠)ㆍ박진필(朴震弼)이라는 계사에 대해 계하하였다.<승정원일기 인조 5년 정묘(1627) 12월 22일(을묘) 05번째기사, 이조가 새로 급제한 자는 권지 성균관 학유 박금 등이라는 계사를 올렸다>
여기에 그의 이름이 慶이 아닌 景으로 잘못 보고되었다.<승정원일기 인조 5년 정묘(1627) 12월 22일(을묘) 05번째기사, 이조가 새로 급제한 자는 권지 성균관 학유 박금 등이라는 계사를 올렸다> 그러나 국조문과방목을 보면 1627년의 식년문과 급제자는 李慶恒이지 李景恒이 아니다. 따라서 景은 慶의 오기임을 알 수 있다.